윤리강국 조선의 건국배경

  aniblack02_back.gif     aniblack02_next.gif

         
 

 

건국이념   (Vision)  

儒敎國家의 건설  

 

體化作業

 

공유가치

(shared value)

 

  

仁,義,禮,智

사단(四端)

     

 공유가치  

삼강오륜

君 爲 臣 綱

父 爲 子 綱

夫 爲 婦 綱

 

君 臣 有 義

父 子 有 親

夫 婦 有 別

長 幼 有 序

朋 友 有 信

조선경국전 

刑  典

  엄격한

  법집행

 綱常의 罪

윤리강령

三綱五倫

통치체제

朝鮮經國典

 
   
         

 

square31_blue.gif 세계최고의 윤리강국 조선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왕조는 조선(趙鮮)이다.

지금 우리의 가치관과 전통문화의 대부분은 조선에서 유래된 것이며 아직도 그 영향 아래서 살아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우리의 DNA유전자에 그대로 이어져 오고 있다.

 

세계최고 윤리강국 조선은

 

건국이념과 체제의 우월성에 있어 우리 조상의 현명함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당대의 최고 엘리트들에 의해 건국된 조선은 왕과 신하 모든 백성이 따라야 할 공유가치(shared value)를 세계최초로 제정하고, 이를 실천하기 위하여 삼강오륜의 윤리강령을 설정하였으며,아울러

 

세계최초의 헌법인 조선경국전을 편찬하여 공유가치와 삼감오륜을 어겼을 경우 이를 엄정히 처벌하였다.

 

또한 이상적인 유교국가를 건설하고 이를 모든 백성에게 체화(體化)하기 위하여 공유가치와 윤리강령을 가르치는 대학을 세웠으며, 서원과 향교, 서당을 통한 지방교육의 활성화를 기하고 과거시험을 통해 엄정하게 유교국가를 통치할 인제를 선발하였고, 아울러 유교적 이상국가로서 삼심제를 법제화하여 지나치게 가혹한 고문이나 형벌을 법으로 금지했다.


어느 왕조 어느 나라에나 그 흥망성쇄의 원인은 있기 마련이다. 조선도 많은 장점과 단점을 가진 왕조였던건은 틀림없은 사실이지만 우리는 아직도 조선의 연장선상에 있다. 조선왕조가 국가의 통치원리원로 유교이념을 정립하면서부터 현재까지도 유교는 우리 정신사의 독자적이면서 보편적 세계를 열어 가는 중추로서 그 기능을 담당해 왔다.

 

square31_blue.gif  조선의 건국배경

 

고려후기는 원나라가 고려의 내정에 간섭하던 시기로 원나라를 등에 업은 `권문세족`의 횡포가 그치지 않았다. 공민왕은 권문세족을 견제하기 위하여 중앙으로 신진 사대부 세력을 끌어드리게 되고 이들이 점차 성장하여 조선이라는 새 왕조의 탄생을 준비하게 된다.


권문세족이 지배한 고려 후반은 극도로 피폐한 정치였으며 그들은 여러 가지 명목과 구실로 부당하게 자신의 토지를 늘려 나갔다. 권문세족들은 자신의 농장에 대한 세금을 한 푼도 내지 않았고, 이는 고려 왕조의 재정적 토대를 무너트리는 근본 원인이 되었다.

이와 같은 권문세족의 횡포에 도전하고 이를 척결한 세력이 `신진 사대부`였다.
권문세족들은 그들 가문이 권력을 세습하고 유지하기 위하여 음서제도를 만들었고 그 제도를 통하여 시험을 보지 않고도 관리가 되었다. 반면 신진 사대부는 가문의 배경 없이 학문과 실력을 바탕으로 과거를 통해 관리가 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주로 지방의 하급 행정 실무자인 `향리`들의 자제들이었다. 또한 지방에 뿌리를 둔 중소지주 출신들로서 권문세족의 대토지 소유에 대하여 매우 비판적이었다. 따라서 신진 사대부들은 고려말의 사회적 폐단을 제거하기 위해서 정치적으로는 권문세족을 몰아내고 경제적으로는 농장을 없애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신진사대부 중에서도 후일 과전법 제정을 주도했던 정도전과 조준,정몽주 등은 그 대표격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은 성리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을 바탕으로 탄탄하고 정치한 이론적 당위성을 주장할 수 있었으며 기존의 권문세족과는 달리 도덕과 명분을 중시함과 아울러 개혁에 대한 의지가 매우 강하였다.

한편 고려말은 홍건적과 왜구가 기승을 부리던 시기였다. 이미 국가재정이 바닥나있던 고려정부는 궁한 나머지 북쪽 변방의 지방 세력가들에게 외적을 방어토록 하고, 공을 세우는 자에게는 관직을 부여하는 정책을 취하였다. 이에 왜구와 홍건적을 토벌하면서 명성을 쌓고 또 관직을 받아 중앙 정계로 진출한 이들이 `신흥 무인 세력`이었다.

신흥 무인 세력의 대표적인 인물이 함경도 지방에서 성장한 이성계였다.

 

이성계 집안은 본래 전주에서 살다가 함경도 지방으로 이주한 이후 가세가 번창하여 그 지방의 세력가로 성장하였다. 지방세력으로 성장한 그의 집안이 중앙 정계와 인연을 맺기 시작한 것은 아버지 이자춘 대에 이르러서였다. 이자춘은 공민왕이 쌍성총관부를 공격할 때 가담하여 큰 공을 세우면서 그 이름을 날리기 시작하였다.

 

그의 뒤를 이은 이성계는 공민왕의 요동 수복 운동과 외적의 토벌에서 혁혁한 공을 세워 중앙 정계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요직으로 나아갔다.고려말에 무장으로서 이름을 날렸던 또 한 사람의 인물로 최영을 들 수가 있다. 그러나 이성계 집안이 변방의 한미한 가문인 반면, 최영의 집안은 중앙의 이름난 문벌 가문이었다. 그는 외적의 토벌에서 용맹을 떨쳤으며 고려 왕조에 대해서도 끝까지 충성하였다.


고려말, 공민왕이 의문의 죽음을 당한 후 개혁은 주춤거리게 되었다. 이 즈음에 고려말의 정치적 격변의 도화선이 되었던 외교문제가 발생하였다. 중국에서 원을 제압해 들어가던 명이 철령(강원도 안변) 이북의 땅을 차지하겠다고 통보해 온 것이었다.(1388년) 이곳은 쌍성총관부가 설치되었던 지역으로 고려가 이미 공민왕 때 탈환한 바 있었다. 따라서 이같은 명의 통보는 고려의 땅을 내놓으라는 요구와 다를 바 없었다.

당시의 최고 실권자 최영은 명과의 일전을 결심하였다.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과거 고구려의 땅이었던 요동을 되찾겠다는 목적으로 요동 정벌을 강력하게 추진하였다. 원명 간의 세력 다툼 가운데 당시 요동이 비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총사령관인 팔도도통사에는 최영, 좌군도통사에는 조민수, 우군도통사에는 이성계가 임명되었고, 7만여 명의 정벌군이 편성되었다.

그러나 우군도통사인 이성계는 `4불가지론(不可之論)`을 들어 요동 정벌을 반대하였다. 하지만 이성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요동 정벌은 강행되었다.


정벌군이 출동하여 선봉부대인 조민수와 이성계의 군대가 압록강의 위화도에, 우왕과 최영의 군대가 안주에 이르렀을 때 최영은 선봉부대에게 진격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장대같은 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위화도의 장군 막사에서는 고려의 운명을 재촉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처음부터 요동 정벌을 반대했던 이성계는 끈질긴 설득 끝에 좌군장 조민수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하였다.

 

이성계는 최영의 명령을 거역하고 군대를 돌려 내려옴으로써 고려 왕조에 대해 반기를 들었다. 당황한 최영은 개경으로 돌아와 천여 명의 군사로 반란군을 저지하려 하였으나 역부족이었다. 개경은 손쉽게 이성계의 손에 장악되었다. 이성계에게 붙잡힌 최영은 명나라에 대한 역적이란 죄목으로 귀양 보내진 뒤 두 달 후 처형되었다.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에 성공하고 실권을 장악한 이후 신진 사대부는 둘로 갈라졌다. 문제의 발단은 `다음 왕을 누구로 할 것인가`였다. 정몽주, 길재를 비롯한 온건파는 우왕의 아들인 창왕을, 정도전, 조준을 비롯한 혁명파는 자기 파에서 인물을 내세우려고 하였다. 온건파의 경우 개혁을 하되 왕조 교체까지는 생각하지 않은 반면, 혁명파는 보다 급진적인 개혁을 위하여 왕조 교체도 감행하겠다는 입장이었다.

 

이 문제는 조민수의 강경한 입장에 따라 일단 우왕의 아들인 창왕이 왕위를 계승하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반란으로 권력을 장악한 이성계는 창왕의 존재 자체가 불안하였다. 그는 심복들과 의논한 끝에 `우왕과 창왕은 왕씨의 자손이 아닌 신돈의 자식`이라고 하여 창왕을 폐함과 아울러 우왕, 창왕을 모두 죽이고 공양왕을 추대하였다.

 

온건파 사대부와 혁명파 사대부 사이의 대립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격화되어 갔다. 그러나 왕이 되려는 이성계의 야심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하면서 온건파 사대부의 위치는 흔들리게 되었다.

온건파 사대부를 대표했던 정몽주는 권문세족들의 횡포에 맞서며 개혁에 참여하였으나, 이성계 일파가 왕위까지 넘보는 현실을 거부했다. 더구나 정도전 같은 학자가 이에 동조함은 성리학자로서 정도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보았다. 이상은 같으나 방법론에서의 차이가 끝내 사대부들의 앞길을 갈라놓고 만다.

한편 혁명파 사대부들은 그들이 구상했던 경제적 개혁을 실천해 나갔다. 그들은 권문세족의 농장을 없애고 국가 재정을 확보하기 위하여 새로운 토지제도인 과전법을 제정, 공포하였다. 과전법에 따라 권문세족의 농장이 모두 몰수되고 그 땅은 다시 신진관료들에게 지급되었다. 이로써 구세력인 권문세족의 물질적 기반이 사라지게 되어 신구 정치 세력의 교체가 이루어졌다.

square31_blue.gif 국가 BUILDER 천재 정도전(鄭道傳/1337~1398)  

dia_pink.gif 정도전  

정도전은 자가 종지(宗之)이고 본관이 경상도 봉화(奉化)인데, 아버지 정운경(鄭云敬)과 어머니 우씨(禹氏) 사이에 맏아들로 태어났다. 당시 본가는 영주(榮州)에 있었지만 그는 외가가 있던 단양(丹陽) 삼봉(三峰)에서 태어났다. 그러므로서 그의 호가 삼봉이 됐으며, 그의 유저로서 <삼봉집(三峰集)>이 남아 있다.

 

정도전은 고려말1362년(공민왕 11) 진사, 이듬해 충주사록(忠州司錄)을 거쳐 전교시주부(典敎寺主簿)·통례문지후(通禮門祗候)를 지내고 부모상으로 사직하였다. 70년 성균박사가 되고 이어 태상박사(太常博士)를 거쳐 예조정랑 겸 성균태상박사(禮曹正郞兼成均太常博士)가 되어 전선(銓選)을 관장하였다.

 

1375년(우왕 1) 성균사예(成均司藝)·지제교(知製敎) 등을 역임하였고 이 해 권신 이인임(李仁任)·경복흥(慶復興) 등의 친원배명(親元排明)정책을 반대하다가 회진현(會津懸)에 유배되었다.1377년 유형을 마치고 고향 영주(榮州)에서 학문연구와 후진교육에 종사하며, 특히 주자학적 입장에서 불교배척론을 체계화하였다.


dia_pink.gif 이성계를 찾아간 정도전

 

고려조 정권 태생의 문제(그의 어머니 우씨(禹氏)가 천인의 피가 섞였다는 사실을 우현보의 세 아들 우홍수(禹洪壽) 등이 세상에 퍼뜨렸다. 집안 혈통이 미천하다고 하여 정도전은 동문수학하던 젊은 유학자들로부터 멸시와 냉대를 받았다. 정도전이 새로운 관직에 임명될 때마다 사헌부의 관리들은 임명장에 서경(署經, 서명)하기를 거부하고 정도전을 괴롭혔다)와 정치생활에서 불우했던 생활을 청산하고 우왕 9년, 함주(咸州)의 이성계를 찾아간 이후의 정 도전의 생애는 그대로 조선 왕조의 건국사(建國史)라 할 수 있다. 정도전이 이성계의 휘하하에 들어간 것은,그는 더 이상 가만히 앉아서 현실을 탓하고 절망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기의 운명을 개척해 나갈 것을 결심했기 때문이다.

 

정도전은 42세가 되던 1383년(우왕 9년) 가을 역성 혁명(易姓革命)에 필요한 군사력을 얻기 위해 함주(함흥)에 있던 동북면 도지휘사(東北面都指揮使) 이성계(李成桂)의 군영(軍營)을 찾아갔다. 자신의 힘만으로는 개혁에 한계성을 절실히 느낀 그는 당시 왜구를 소탕하여 이미 많은 지지기반을 갖고 있던 이성계의 힘이 필료했고 이를 빌려서 자기가 원하는 유교국가의 건설을 시도하게 된다.

 

당시 이성계 휘하에는 정도전 이외에 많은 인물들과 문사들이 있었지만, 실질적으로 이성계 계열의 정책을 주도적으로 이끌어 간 것은 정도전이었다. 그는 자신과 이성계와의 관계를 한(漢) 나라의 장양(張良)과 고조(高祖)와의 그것에 비유하면서 '한 고조가 장 양을 이용한 것이 아니라, 장양이 한 고조를 이용하였다고 왕왕 토설하곤 했다.

 

이성계를 찾아 함주로 발길을 옮길 때부터 그는 이미 장양의 원대한 경륜과 야심을 가슴속에 품었는지도 모른다.「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에 의하면 함주에서 정도전은 이성계의 군대가 군기가 엄숙하고 대오가 질서 정연한 것을 보고 '참 훌륭합니다. 이런 군대라면 무슨 일인 듯 못하겠읍니까?'라고 찬탄하여 이미 역성혁명의 시작은 이미 이때부터 실천에 옮겨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우왕 14년(1388) 6월에 이 성계가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하여 정권을 잡게 되자, 그는 밀직 부사(密直副使)로서 전제(田制) 개혁운동을 주도하고 이를 단행하였다. 그는 전제 개혁운동의 표면에 나서지는 않았으나, 실질적으로 계민수전(計民授田)의 원칙에 의한 전제 개혁을 주도한 것은 그였으며, 조준(趙浚)·윤소종(尹紹宗) 등이 그의 의견을 따라 전제 개혁 상소를 올린 것이었다.

 

전제 개혁을 실천하는 제조관(提調官)의 자리에 있었던 것도 정도전이었다. 전제 개혁 후에 분전불균(分田不均)에 대한 원망이 그엑게 집중된 것도 이런 까닭이었다.1389년 11월에는 이성계·조준이 우왕을 신돈의 자손이라 하여 폐위시키고, 왕족 가운데서 공양왕(恭讓王)을 맞아들였으며, 그 공으로 공신에 책봉되고 삼사우사(三司右使)직에 임하였다.

공양왕 3년(1391)에 그는 삼군 도총제부(三軍都摠制府)의 우군총제사(右軍摠制使)에 올랐다. 5군(五軍) 제도를 파하고 3군을 설치한 것은 이성계가 군사권을 장악하기 위한 조처로서 이성계가 도총제사, 조 준이 좌군총제사를 각각 차지하였다.

 

군사 제도의 개혁도 기본적으로는 그의 계획에 의한 것으로, 조선 왕조 개창 후에는 의흥삼군부(義興三軍府)로 개편하고 그 책임의 자리에 앉아 계속 병권을 장악하였다.전제 개혁에 의하여 경제권을 장악하고, 군제 개혁에 의하여 군사권을 장악한 다음 역성혁명(易姓革命)을 완성하기 위하여 그는 반대파인 이색(李穡)·우현보(禹玄寶) 등을 탄핵하다가 도리어 패하여 봉화(奉化)로 유배되었으며,

 

다음해 공양왕 4년(1392) 4월에 다시 고려 왕조를 옹호하던 정몽주(鄭夢周)·김진양(金震陽) 등의 탄핵을 받아 예천(醴泉)의 옥에 갇히게 되었다. 이때 이 성계는 해주에서 사냥하다가 말에서 떨어져 부상을 입었고, 조준·남 은 등도 유배되어 이 성계 일파는 큰 위기에 봉착하였다.

 

이에 위급해진 이 성계는 역성혁명의 반대파 영수인 정 몽주를 격살하고, 이어서 같은 해 7월에 정 도전·조준·남은 등은 50여 명의 신하들과 함께 이 성계를 신왕(新王)으로 추대하여 드디어 역성혁명을 성공시키기에 이르렀다.

 

dia_pink.gif 정몽주와 절친했던 정도전

고려 말에 태어난 정몽주(1337~1392년), 정도전(1342~1398년), 하륜(1347~1416년) 세 사람의 출생연도를 보면 나이가 각기 5년씩 차이가 난다. 이색의 문하에서 공부할 때에 정도전보다 5년 선배였던 정몽주는 정도전을 항상 동생처럼 이끌어 주고, 성리학의 심오한 세계를 깨우쳐 주었다.

 

하륜도 이색의 문생(門生)이었는데, 정몽주와는 10년의 나이 차이가 있었으므로  정몽주를 무척 어려워 했다. 하륜은 원래 정도전과는 친숙하지 않았던 것 같고 오히려 권근(1352~1409년)과 가까이 지냈는데, 하륜은 권근보다 나이가 다섯살 위였다. 정몽주가 1392년에 이방원에 의해 죽고 조선왕조가 개국되자 정도전의 전성시대가 열리게 되었으며, 1398년에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 정도전이 죽자 하륜의 전성시대가 오게 되었다.  

 

정도전은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머리가 명석했다고 한다. 이색의 문하에서 정몽주, 이숭인(李崇仁), 이존오(李存吾), 김구용(金九容), 김제안(金齊顔), 박의중(朴宜中), 윤소종(尹紹宗) 등과 친구가 되어 쉬지 않고 유학을 공부하여 높은 학식을 쌓아나갔다. 당시 이색의 문하에서 정도전의 위치를 보면 경학에서는 정몽주, 권근 등과 비길 만큼 심오한 경지에 도달했으며, 문장에서는 이숭인 등과 앞뒤를 다툴 만큼 내용이 호방하고 글이 유려했다. 당시 사람들은 그의 문장이 제일이라고 추켜올리기를 주저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숭인과의 경쟁   의식이 조선왕조가 건국된 뒤에 그를 참혹하게 죽이는 원인이 되었다고도 한다.

 

정도전과 정몽주의 절친한 교우관계를 나타내는 일화가 하나 있다. 정몽주가 정도전에게 <맹자(孟子)> 한권을 선물로 주었는데, 정도전은 매일 그 <맹자>를 한장씩, 혹은 반장씩 읽고 철저히 연구하여 깊은 경지에 이르렀다고 한다. 평상시에 정도전은 정몽주를 존경하고 그의 학풍을 추종했다. 후일 정몽주가 죽은 후에, 정도전은 그의 유학 체계를 조선왕조에  계승시키려고 노력했으며, 가끔씩 자기만이 정몽주의 심오한 유학 세계를 이해할 수 있다고 술회하기도 했다.   

 

그러나 고려 말의 혼란기에 나라와 백성을 구원하는 방법을 둘러싸고 서로 의견을 달리하면서 정도전과 정몽주의 사이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정몽주는 유학의 보수파로서 정통 본류를 형성하여 고려왕조를 지키려고 애썼고, 정도전은 유학의 좌파로서 개혁을 추진하여 새로운 왕조를 세우려고 노력했다.   

 

dia_pink.gif 조선도읍을 현재의 서울로 정한 정도전

1394년(태조 3년) 10월에 서울을 한양으로 옮길 때에 정도전은 하륜의 주장을 물리치고 도성이 들어설 자리를 오늘날 서울의 4대문 안으로 정했다. 그 다음해 10월에 새 서울 한양의 궁궐과 종묘가 완성되자, 정도전이 새로 지은 궁전과 누각 이름을 붙였다. 오늘날도 사용되는 경복궁(景福宮), 사정전(思政殿), 근정전(勤政殿) 등의 이름은 그 당시에 정도전이 지은 것이다.   

 

또 도성(都城)이 완성되자 동서남북의 크고 작은 성문 이름도 모두 정도전이 지었는데, 남대문은 숭례문(崇禮門), 동대문은 흥인문(興仁門), 서대문은 돈의문(敦義門), 북대문은 숙청문(肅淸門)이라고 했다. 그뿐만 아니라 도성 안 5부(部) 49방(坊)의 이름도 모두 그가 지었다. 이처럼 조선왕조 창업 당시에 크고 작은 일들은 모두 정도전의 손을 거쳐 이루어졌다.